요약 이 글은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의 7장에서 옮긴 글입니다. 인생의 전반부에 저는 종교라는 고속열차를 탔고, 후반부에 철학이라는 자가용으로 갈아탔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보다, 지금 타고 있는 것을 내가 골랐는지를 아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일요일 아침이면 갈 곳이 정해져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교회였습니다.
옷을 갖춰 입고 나섭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가 저를 기다립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저는 한 번도 헷갈리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일요일 아침에 갈 곳이 없습니다. 그 차이가 이 글의 이야기입니다.

1부에서 말씀드린 것은 무너진 몸을 다시 세운 순서였습니다. 음식이 먼저고, 운동이 그다음이고, 감정이 그다음이고, 생각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돌아오니 새 질문이 왔습니다. 이 힘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몸의 순서는 여기에 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는 순서였습니다. 일어선 사람이 어디로 걸을지는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1부가 저를 다시 세우는 순서였다면, 2부는 세상을 걸어가는 순서입니다.
두 곳을 다 드나들어 본 사람으로서
그 순서를 찾는 사람 앞에는 크게 두 개의 가게가 있습니다. 두 곳을 다 드나들어 본 사람으로서, 식당에 빗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가게는 오마카세입니다. 종교입니다.
오마카세의 미덕은 완성도입니다. 무엇을 먹을지 제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코스 전체가 이미 설계되어 있고, 저는 믿고 따라가면 됩니다. 종교가 그렇습니다. 삶의 가장 큰 질문에 답이 정돈되어 있습니다. 먼저 걸어간 분의 모범이 있습니다. 손에 쥐고 매일 묵상할 경전이 있습니다. 같은 코스를 즐기는(?) 단골들의 공동체도 있습니다. 서로 일깨워 주고, 힘들 때 곁에 있어 줍니다. 결정적으로 이 식당은 식사가 끝난 뒤까지 책임집니다. 등 뒤에서 나를 지켜 주는 분이 계시다는 감각. 그것이 사람을 얼마나 담대하게 만드는지 저는 압니다.
어떻게 아느냐. 제가 이 식당의 오랜 단골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교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인생의 전반부에 저는 종교에서 정말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방향을 받았고, 공동체를 받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한국 사회에서 신앙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은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신앙 생활이 아닌 종교 생활, 아니 교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성과 후회가 제가 교회를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종교 비판으로 읽지는 말아 주십시오. 저는 이 식당의 음식이 훌륭하다는 것을, 먹어 본 사람으로서 증언하는 중입니다.
20대와 30대의 저는 흔들릴 일이 많았습니다. 회사에서 깨지고, 사람에게 서운하고, 앞이 안 보이던 밤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를 붙잡아 준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일요일마다 같은 자리에 앉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 그 시절의 저에게는 그것이 큰 힘이었습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 확실하게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 것은 때로는 선물입니다. 흔들리는 사람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다만 자유에는 청구서가 붙습니다
두 번째 가게는 뷔페입니다. 철학입니다.
뷔페의 특징은 자유입니다. 접시를 들고 제가 직접 고릅니다. 소크라테스도 있고 니체도 있고 동양의 사상가들도 있습니다. 고급 뷔페인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자유에는 청구서가 붙습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입에 당기는 것만 담을 수도 있고, 당기지 않지만 몸에 좋을 것을 담을 수도 있습니다. 잘못 고르면 접시가 엉망이 됩니다. 그 책임을 주방에 물을 수 없습니다. 고른 사람이 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느 식당이 좋은 식당일까요.
제 답은 말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회피가 아니라 이것이 제 진짜 답입니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성향과 시기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두 가게의 차이를 더 선명하게 보여 주는 비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드리고 제 선택을 밝히겠습니다.
이동 수단입니다. 신에게 삶을 의탁하는 것은 고속열차를 타는 일과 같습니다. 빠릅니다. 검증된 노선을 흔들림 없이 달립니다. 제가 운전을 못해도 갈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이 열차는 종착역이 현생 너머에 있습니다. 철학은 자가용 운전입니다. 열차만큼 빠르지 않습니다. 길을 잘못 들 수도 있습니다. 대신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제가 원하는 시행착오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자가용에는 내세 보장이 없습니다.

고속열차에도 위험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고속열차에도 위험이 하나 있습니다. 열차는 빠른데, 내려서 보니 그곳이 제가 진정 원한 목적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노선은 열차 회사가 정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신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언제 시작됐는지를 저는 기억합니다. 30대 초반에 일 때문에 중동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두바이, 이란, 파키스탄 등 평소 가보기 쉽지 않은 곳들이었죠. 그곳에도 제가 배운 것과 다른 답을 가지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테러리스트, 이상한 사고방식을 가진 존재들이라 여겼던 이슬람교도인 사람들. 출장을 다니며 만난 일상 속의 그들은 오히려 한국인의 정서와 통하는 부분이 많은 착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저는 처음으로 제 노선을 바깥에서 바라봤습니다. 그날로 열차에서 내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때부터 창밖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을 본 사람은 언젠가 역 이름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제 선택은 이랬습니다. 인생의 전반부에 저는 열차를 탔고, 그 여정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자가용으로 갈아탔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직접 골라 보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제 방식대로 생각을 한번 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더 빠른, 어쩌면 아주 편안한 길을 두고 굳이 스스로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기록일 뿐입니다. 누군가는 열차에 남는 편이 맞고, 누군가는 운전대를 잡는 편이 맞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지금 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내가 골랐는지를 아는 일입니다.

열차에서 내린 뒤에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내세를 저는 지금도 모릅니다. 죽은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아직은요.) 열차에는 그 답이 실려 있었고 자가용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이 글에서 제가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는 채로 운전대를 잡기로 한 것이 제 선택이었다는 말씀까지만 드리겠습니다.
질문 하나만 드리고 이 글을 닫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타고 계신 것은 열차입니까, 자가용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이 고르신 겁니까, 처음부터 거기 타고 계셨던 겁니까. 어느 쪽이든 부끄러운 답은 없습니다. 다만 알고 타는 것과 모르고 타는 것은 다릅니다.
이 글은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와 도해 34장은 연재 목록에서 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peterhan.kr/blog/humanities/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