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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3부작을 한 문장으로 꿰면 — 이야기를 짓는 쪽은 누구인가

유발 하라리의 세 권은 각각 다른 책처럼 보이지만 한 질문을 세 번 던집니다. "이야기를 짓는 쪽은 누구인가."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호모 데우스에서는 데이터가, 넥서스에서는 인간이 아닌 것이 그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발표장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입니다.

독일 남부의 한 동굴에서 상아 조각이 나왔습니다. 매머드 엄니를 깎은 30센티미터짜리 인형입니다. 만들어진 지 약 4만 년이 되었습니다.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사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만 짚겠습니다. 그런 동물은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 세상에 없는 것을 며칠에 걸쳐 손으로 깎았습니다. 배가 고팠을 텐데도 그 시간을 들였습니다.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 유물로 굳어진 셈입니다. 유발 하라리의 책 세 권은 전부 이 인형에서 출발합니다.

4만 년 전, 누군가 세상에 없는 것을 깎았습니다

사람은 왜 없는 것을 믿을까요

『사피엔스』의 답은 지능이 아니라 협력의 규모입니다.

침팬지도 협력합니다. 다만 서로 아는 사이여야 합니다. 인류학자 로빈 던바가 제시한 숫자가 150입니다. 얼굴과 성격을 기억해 어울릴 수 있는 인원의 한계입니다. 휴대폰에서 실제로 연락하는 사람을 세어 보시면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사피엔스는 150을 훌쩍 넘겼습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면서 수십억 명이 한 체제 안에서 움직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같은 이야기를 믿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776년경 함무라비 왕은 법전을 돌에 새겼습니다. 맨 위에는 태양신이 왕에게 법을 건네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돌 하나로 수십만 명이 같은 규칙 아래 살았습니다.

지갑 속 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데 내밀면 밥이 나옵니다. 모두가 믿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 하나로 작동합니다.

신이 주었다고 하면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호모 데우스』는 그 이야기가 갈아탄 자리를 추적합니다.

오랫동안 세상의 중심에는 신이 있었습니다. 근대에 그 자리에 인간이 앉습니다. 하라리는 이 전환을 인본주의라고 부릅니다. 핵심 문장은 짧습니다. 네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

이 문장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 있습니다. 정치에서는 유권자의 선택이 옳고, 시장에서는 소비자가 왕이고, 연애에서는 내 감정이 최종 심판입니다. 전부 내 안의 목소리를 재판관 자리에 앉힌 구조입니다.

그런데 하라리가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그 목소리가 알고리즘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이미 조짐은 있습니다. 넷플릭스는 내가 다음에 볼 것을 나보다 먼저 압니다. 지도 앱이 추천한 길을 우리는 대체로 따릅니다. 내 감보다 낫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 흐름의 끝에 하라리가 붙인 이름이 데이터교입니다. 네 마음을 따르라가 데이터를 따르라로 바뀌는 세계입니다.

오해를 하나 풀겠습니다. 그는 이 미래를 예언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작업을 예언이 아니라 경고라고 여러 번 말했습니다. 화재 대피 훈련을 한다고 불이 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보가 많아지면 진실도 많아질까요

2024년에 나온 『넥서스』는 내용물이 아니라 배관을 봅니다. 그 믿음이 어떻게 퍼졌는지를 다룹니다.

하라리가 겨냥하는 것은 우리 대부분이 가진 생각입니다. 그가 순진한 정보관이라고 부르는 믿음, 정보가 많아지면 진실이 드러나고 진실이 드러나면 지혜로워진다는 기대입니다.

그가 내미는 반례는 서늘합니다. 1486년 하인리히 크라머가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를 냅니다. 마녀를 알아보고 심문하고 처형하는 법을 담은 실용서입니다. 이 책은 유럽에서 대단한 판매고를 올렸습니다. 무엇 덕분이었을까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입니다.

우리는 인쇄술을 과학혁명의 어머니로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계가 마녀 사냥 지침서도 찍었습니다. 그 뒤 수백 년 동안 수만 명이 마녀로 몰려 죽었습니다. 정보는 늘었습니다. 진실은 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이 책의 핵심 문장이 나옵니다. 정보의 본질은 진실이 아니라 연결입니다. 사람을 묶는 데 성공하면 사실이 아니어도 살아남습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잘 퍼지는 것은 시스템의 고장이 아니라 시스템의 성질입니다.

그러면 인류는 어떻게 버텨 왔을까요. 하라리의 답은 자정 장치입니다. 과학의 반박, 법정의 반대신문, 언론의 정정, 민주주의의 선거. 전부 우리가 틀렸을 수 있다를 절차로 못 박은 장치입니다.

그리고 이번은 다릅니다. 인쇄기는 스스로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라디오는 스스로 연설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정보 기술은 도구였습니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문장을 만들고 결정을 내립니다. 하라리가 AI를 도구가 아니라 행위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정보가 늘면 진실도 늘어날까요

세 권을 한 문장으로 꿰면

『사피엔스』는 인간이 이야기로 뭉쳤다고 말합니다. 『호모 데우스』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인간에서 데이터로 넘어간다고 말합니다. 『넥서스』는 이야기를 짓는 자리에 인간이 아닌 것이 앉았다고 말합니다.

세 권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세 번 던진 셈입니다. 이야기를 짓는 쪽은 누구인가.

4만 년 전에는 사자 머리를 깎던 사람이었습니다. 4천 년 전에는 돌에 법을 새기던 왕이었습니다. 지금은 화면 너머에서 문장을 만드는 무언가입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사피엔스』에서 허구를 믿는 능력은 인류의 초능력이었습니다. 감탄의 대상이었습니다. 『넥서스』에서 같은 능력은 위험 목록의 첫 줄에 올라 있습니다. 저자가 13년에 걸쳐 자기 주장에 자정 장치를 건 셈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세 권에서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이야기를 짓는 쪽은 누구인가

그런데 왜 저는 인문학을 붙들고 있을까요

회사원 시절, 저는 미국 유학파 선배와 저를 늘 비교했습니다. 네이티브 영어에 예의범절까지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입사와 동시에 미국 시장을 맡았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지내다 어느 날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잘하는 것은 따로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거래선 앞에서 발표할 때 제일 살아났습니다.

그때는 그게 취미인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그게 제 일입니다.

인문학이 발표와 무슨 상관인가 싶으실 겁니다. 상관이 큽니다. 발표장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도 데이터가 아니라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숫자를 놓고도 어떤 발표는 통하고 어떤 발표는 통하지 않습니다. 차이는 그 숫자를 무슨 이야기 안에 넣었느냐입니다. 청중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믿고 있는 이야기를 안다는 뜻입니다.

30초 실천

다음 발표 자료를 열고 첫 장을 보십시오. 거기에 숫자가 먼저 있습니까, 이야기가 먼저 있습니까.

숫자가 먼저라면 한 줄만 위에 얹어 보십시오. "이 숫자는 무엇이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 한 줄이 청중의 머릿속에 상자를 하나 만들어 줍니다. 숫자는 그 상자에 담깁니다.

자주 받는 질문

세 권 중 한 권만 읽는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지금 상황이라면 『넥서스』입니다. AI를 다루는 책 중에 역사의 길이를 가진 것이 드뭅니다. 다만 『사피엔스』를 먼저 읽으면 『넥서스』의 문장이 훨씬 잘 붙습니다.

하라리의 주장에 반론은 없습니까. 많습니다. 역사학계에서는 그의 큰 그림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비판이 꾸준히 나옵니다. 저는 그 비판이 타당하다고 보면서도 이 책들의 쓸모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답을 얻는 책이 아니라 질문의 크기를 키우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발표에 인문학을 넣으면 잘난 척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인용을 던지면 그렇게 보입니다. 인용 뒤에 내 해석 한 줄을 붙이면 달라집니다. 남의 문장이 아니라 내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조각하고 있을까요.

4만 년 전 그 상아 조각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다음 조각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다룬 책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19년째 전문가와 사업가의 발표를 훈련합니다. 140개 고객사, 포춘 500대 기업 32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