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이 글은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 8장에서 옮긴 글입니다. 저는 천지인을 거꾸로 읽습니다. 사람이 먼저고, 땅이 다음이고, 하늘이 마지막입니다. 하늘은 중요하고 땅은 급합니다. 저는 연기 속에서 별을 보려던 사람이었습니다.
책상 앞이었습니다. 저는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을 읽고 있었습니다. 강의하는 사람이니 사람을 알아야지, 하는 실용적인 마음이었습니다. 남을 더 잘 이해해 보려고 편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상했습니다. 책이 자꾸 저를 쳐다봤습니다.
인간은 게으르다. 너도 그렇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다. 너도 그렇다. 인간은 은근히 남을 무시한다. 저자는 집요하게 지적합니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은 남에게서 보기 전에 너 자신에게서 먼저 보라고. 그러다 한 문장에서 저는 책을 잠시 내려놓았습니다. 인간은 시기하는 존재다. 그 페이지에서 저는 제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이 고백은 뒤에서 제대로 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날 제가 무엇을 알았는지만 적겠습니다. 남을 분석하려고 편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읽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뷔페의 첫 접시가 왜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저는 그날 알았습니다.

저는 거꾸로 읽습니다
앞 편에서 말씀드린 순서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순서를 천지인(天地人)에서 가져왔습니다. 하늘과 땅과 사람. 보통은 하늘부터 읽습니다. 저는 거꾸로 읽습니다. 사람이 먼저고, 땅이 다음이고, 하늘이 마지막입니다. 제가 이해한 한에서는, 이 세 글자를 공부의 차례로 쓰는 것은 원래의 용법이 아닙니다. 헤매다가 제가 그렇게 쓰기로 한 겁니다.

사람이 첫 접시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나를 모르면 그다음 판단이 전부 틀어지기 때문입니다. 열여덟의 저는 제 몸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남의 수면 공식을 빌려 쓰다 무너졌습니다. 50이 넘어서는 제 마음의 생김새를 몰랐습니다. 그럴듯한 말 뒤에 부끄러운 것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구조가 같습니다. 자기 이해가 첫 단추입니다. 첫 단추 없이 담는 지식은 남의 접시를 베낀 접시가 됩니다.
제 생김새를 인정하고 나니 남을 보는 눈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의 저는 사람들을 채점하며 봤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이기적이지. 왜 남의 말을 안 듣지. 전부 문제다, 라는 시선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사람이 부족하구나. 이익을 쫓는구나. 그렇구나, 라는 시선입니다. 채점은 화를 낳지만 관찰은 예측을 낳습니다. 무엇보다 제 다음 행동이 예측됩니다.
두 번째 접시는 땅입니다
두 번째 접시는 땅입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철학책을 5분 만에 덮은 어느 아침에서 시작합니다.
그날 저는 사 둔 철학책을 펼쳤습니다. 커피도 준비했고, 시간도 있었고, 읽을 의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5분이 되지 않아 책을 덮었습니다.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그 책을 읽고 있는 제 모습이 문득 공허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이런 자각이었습니다. 나는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도 돈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제대로 모른다. 그 공부를 건너뛴 채 형이상학(세상의 근본을 따지는 공부)을 논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땅에 발을 딛지 못한 사람이 하늘부터 올려다보고 있구나.

제가 말하는 땅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작동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합의해서 만들어 놓은 시스템,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돈입니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질문은 소박합니다.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가. 나는 그 흐름의 어디에 서 있는가.
부끄럽게도 저는 인생의 전반부 내내 이 공부를 건너뛰었습니다. 건너뛴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당위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이래야 한다. 돈보다 가치가 중요하다. 그런 문장들 쪽에 서 있었습니다. 5편에서 말씀드린 그 판단도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때 제 문제는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지 않은 채 곧장 채점으로 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소신과 무지는 결론이 같아도 서로 다른 것인데, 저는 오랫동안 무지를 소신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수염 난 철학자, 마르크스입니다.
그의 명제 하나만 빌리겠습니다. 한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아래에 있고, 철학이나 예술이나 종교 같은 정신의 세계가 그 위에 얹혀 있다는 것. 아래가 흔들리면 위도 흔들린다는 것. 있어 보이는 표현으로 ‘하부구조(먹고사는 구조)가 상부구조(생각의 세계)를 결정한다’는 것이죠. 이론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론이 아니라 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명제를 세운 본인 스스로가 완전히 반전 캐릭터입니다. 평생 친구 엥겔스의 돈에 기대어 살았습니다. 런던의 좁은 셋방에서 어린 자식을 여럿 잃었습니다. 그중 한 아이의 관을 살 돈이 없어 이웃에게 손을 벌린 일도 있습니다. 돈이 정신의 세계를 떠받친다는 것을 꿰뚫어 본 유물론자. 그런데 정작 자기 삶의 토대는 남의 주머니에 맡겨 두었던 겁니다. 저는 이 아이러니를 비웃을 수가 없습니다. 규모만 다를 뿐,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땅을 살피지 않은 것은 저도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땅 공부에 관한 제 결론은 두 단계입니다. 먼저 세상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을 있는 그대로 공부하고 인정할 것. 그다음 그 이해 위에서 제 경제적 토대를 만들 것. 이것은 도덕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여전히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현실을 이해한 다음의 비판은 힘이 있고, 현실을 모르는 채의 비판은 공허합니다. 당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당위를 맨 앞에서 맨 뒤로 옮기는 일입니다.
마지막 접시가 하늘입니다
마지막 접시가 하늘입니다. 본질의 영역입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뷔페로 치면 가장 안쪽 코너입니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어 하는 코너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인생의 전반부에 저는 이 코너의 단골이었습니다. 학생 때부터 현실계에서는 거의 왕따에 가까운 존재였으니까요. 탈출구는 현실 초월이었죠.
그런 제가 하늘을 맨 마지막에 놓자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늘을 낮춰 봐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세 접시 가운데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 하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언젠가 반드시 마주하게 됩니다.
다만 하늘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의 삶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생 전체의 방향은 바꿉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의 통장 잔고는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늘은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겪어서 압니다.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것은, 급한 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제대로 다룰 수 없습니다. 급한 불이 붙은 사람에게 별을 보라고 하면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별이 없어서가 아니라 연기 때문입니다. 제가 바로 그 연기 속에서 별을 보려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과 땅에 비중을 둔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하늘로 비중을 옮기는 날이 언제일지는 저도 모릅니다. 토대가 얼마나 쌓여야 그날이 오는 것인지, 기준을 아직 못 세웠습니다. 이것이 이 글에서 제가 모르는 것입니다.
질문 하나를 남기겠습니다. 5편에서 드린 질문을 한 번 더 드립니다. 확신을 갖고 채점해 오신 일 가운데, 정작 공부해 본 적은 없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그 목록이 꽤 길었습니다.
이 글은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와 도해 34장은 연재 목록에서 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peterhan.kr/blog/humanities/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