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이 글은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의 4장에서 옮긴 글입니다. 40대의 저는 공부하지 않고 도덕으로 세상일을 채점했고, 그것을 소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재료 없이 내린 판단은 소신이 아니라 무지였습니다.
나는 저 대열에는 서지 않겠다
40대의 어느 해였습니다. 집값이 오르고 있었고, 어디를 가나 그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제가 자주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저 대열에는 서지 않겠다.
제 생각의 근거도 분명했습니다. 저렇게 비싼 값에 집을 사서 값을 더 올려놓는 행렬에 끼는 것은 옳지 않다. 다음 세대를 생각해서라도 나는 안 하겠다. 자산 가격이 올라서 생기는 소득은 일해서 번 돈과 같은 것이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노동의 값어치는 어디로 가는가. 국가 경쟁력은 아파트가 아니라 숙련된 사람들의 노동에서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저는 이런 관점을 절대적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갖고 있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대목을 쓰는 지금이 이 글에서 제일 민망합니다.
그 시절의 저를 한 단어로 부르면 당위의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래야 한다. 돈보다 가치가 먼저다. 저는 그런 문장들 쪽에 서 있었고, 그쪽에 서 있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도덕적 우월성을 혼자 해석하며 즐겼습니다. 뒤늦게 돌아보니 제 당위에는 구멍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도 제가 충분히 공부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책을 깊이 읽고 다다른 결론이 아니라, 주워들은 조각으로 세운 판단이었습니다. 다른 하나가 더 결정적입니다. 저는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래야 한다'에 몰두하느라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를 밀어냈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채점이 편했습니다
심지어 저는 근거로 쓸 만한 지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토마 피케티라는 경제학자의 『21세기 자본』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한에서 그 책의 뼈대는 이렇습니다. 노동으로 버는 수익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수익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가진 쪽과 일해서 버는 쪽의 간격은 저절로 벌어진다. 피케티는 금융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책을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두꺼운 책이고 논쟁도 많은 주장이지만, 노동 수익이 자본 수익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그 한 줄은 제 귀에 또렷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지식을 세상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쓰지 않았습니다. 세상이 문제라며 채점하는 데 썼습니다.
그 차이는 매우 큽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다음 질문으로 갑니다. 그러면 나는 이 구조 안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반면 채점하는 사람은 거기서 멈춥니다. 저것은 잘못됐다, 라고 적고 채점표를 덮습니다. 저는 채점표를 덮고 그냥 열심히 일했습니다. 집값은 저의 도덕적 판단과 무관하게 계속 올랐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채점이 편했습니다. 채점은 빠릅니다. 기사 몇 줄이면 됩니다. 공부는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제도를 봐야 하고, 숫자를 봐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하고, 저와 반대로 판단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도 봐야 합니다. 시간이 들고, 중간에 제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느리고 불편한 쪽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그 회피에 도덕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문장을 쓰는 데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저는 그 시기를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제가 그때 실제로 무엇을 알아보고 공부했는지 적어 보려고 했습니다. 몇 줄 적다가 그만뒀습니다. 적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아보고 안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르고 안 한 것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이 글의 전부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충분히 살펴본 뒤에 "그래도 나는 이 길로 가지 않겠다"고 정했다면, 그것은 소신입니다. 저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해를 건너뛰고 곧장 판정으로 갔습니다. 결론이 같아도 과정이 다르면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무지를 소신이라고 불러 왔습니다.

판단에는 재료가 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부동산 하나의 일이었다면 저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되짚어 보니 같은 모양이 여러 군데 있었습니다. 저는 세상일을 놓고 자주, 빠르게, 분명하게 결론을 냈습니다. 그 결론의 재료가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궁색해집니다. 어디서 읽은 기사 몇 줄, 누군가의 말, 그리고 제 기분. 그것으로 저는 옳고 그름을 갈랐습니다. 아는 사람의 판단과 모르는 사람의 판단은 겉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둘 다 똑같이 단호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쪽이 더 단호할 때가 많습니다. 반대편의 사정을 모르니 망설일 이유도 없어서입니다.
이 글의 제목에 쓴 '재료'라는 말을 조금 풀어 두겠습니다. 저는 판단을 요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판단에는 재료가 듭니다. 이 일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관련된 사람들이 각각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지, 지금까지 비슷한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런 것들이 재료입니다. 재료가 있으면 다듬고 숙성하고 요리하느라 결론이 늦게 나옵니다. 재료가 없으면 결론이 빨리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제 결론이 빨리 나오는 것을 오랫동안 명석함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지금은 반대로 봅니다. 결론이 너무 빨리 나오면 먼저 냉장고부터 열어 봅니다. 대개 비어 있습니다.

판단이 틀어진 날에 경고 알람이 울리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을 두 번째 무너짐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습니다. 열여덟의 무너짐에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시험이 있었고, 점수가 있었고, 떨어졌다는 통지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바로 알았습니다. 40대의 무너짐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판단이 틀어진 날에 경고 알람이 울리지 않습니다. 성적표도 오지 않습니다. 저는 무너진 줄도 모른 채로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청구서는 나중에, 그것도 한 번에 왔습니다. 이렇게 조용히 무너지는 쪽이 사실 더 무섭습니다. 알아채는 데 오래 걸리니까요.
그 10년 동안 제가 무엇을 했는지도 적어 두어야 공평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일을 더 했습니다. 재료를 모으는 대신 시간을 더 넣었습니다. 강의를 더 많이 했고, 준비를 더 오래 했고, 주말을 덜 쉬었습니다. 판단이 막힐 때 노력으로 메우는 방식은 저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이었습니다. 열여덟에도 그랬으니까요. 그때는 잠을 넣었고, 40대에는 시간을 넣었습니다. 넣는 것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부족한 칸을 확인하지 않고 옆 칸을 채운다는 점에서는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제가 모르는 것을 적어 두겠습니다. 그때 제대로 공부했더라면 제가 다른 결론에 갔을지, 저는 지금도 모릅니다. 공부한 끝에 똑같이 "나는 안 하겠다"로 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저는 지금 이 글을 훨씬 편한 마음으로 쓰고 있었을 겁니다. 하나 더 밝혀 둘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경제 쪽의 공부와 이해가 가장 늦은 사람입니다. 뒤늦게 배우는 중이고, 아직 남에게 설명할 수준이 아닙니다.

당신께 질문 하나 드립니다. 당신이 확신을 갖고 채점해 온 세상일 가운데, 실은 제대로 알아본 적이 없는 것이 있습니까. 그 확신은 소신입니까, 아니면 소신의 옷을 입은 무지입니까. 찔리는 질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도 이 질문 앞에서 한참 앉아 있었습니다.
이 글은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와 도해 34장은 연재 목록에서 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peterhan.kr/blog/humanities/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