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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 아니었다 — 고3, 사당오락

요약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 3장에서 고3의 두 장면을 옮겼습니다. 사당오락을 믿고 잠을 줄인 열여덟 살, 그리고 수학을 놓은 겨울입니다. 실패한 것은 제가 아니라 저에게 맞지 않는 공식이었습니다.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눈은 떠졌는데 몸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겨우 몸을 끌고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인생 처음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젠장, 사는 거 힘들다.

뱉어 놓고 스스로 놀랐습니다. 아니, 마치 또 다른 내가 빙의해서 말한 것 같았습니다.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며 매일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때의 전날 밤도 비슷했습니다. 부모님이 큰맘 먹고 새로 산 텔레비전과 비디오가 거실에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의 인강처럼 방송 강의를 듣기 위한 제 학습 도구였습니다. 강의를 틀어 놓고 공부를 하다가 화면이 켜진 채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 밤이 계속됐습니다. 자다 깨면 다시 꿈속인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장자의 호접지몽(나비가 된 꿈) 같은 건데 그 최악의 버전이었습니다.

자다 깨면 다시 꿈속인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유행한 '남들만큼'은 이거였습니다. 사당오락. 네 시간 자면 붙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지금 보면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그 시절에는 진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른들이 말했고, 선생님이 말했고, 옆자리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게 저의 고3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이 문장이 이 이야기의 비극입니다.

왜 의심하지 않았을까. 그때 제 머릿속을 누르던 것은 압박감이었습니다. 이렇게 안 하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 남들에게 뒤처진다. 남들이 다 하는 방식을 나만 안 하고 있으면 불안합니다. 불안한 사람은 방법을 고르지 않습니다. 그냥 많이 하는 쪽을 고릅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많이 하는 쪽은 잠을 줄이는 쪽이었습니다.

성실했기 때문에, 아니 성실하려 했기 때문에 저는 그 말을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잠부터 줄였습니다. 새벽에 억지로 일어났고,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었는데, 제 몸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압니다. 저는 8시간, 최소 7시간을 자야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7시간이 필요한 사람이 네 시간을 자면 어떻게 되느냐. 잔 시간이 네 시간 줄어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깨어 있는 스무 시간이 통째로 망가집니다. 새벽 기상에 성공한 날에도 오전 내내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누구보다 길었는데, 공부가 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의 저도 삶이 무거웠습니다. 열여덟, 열아홉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무게였습니다.

그림 3-1 남의 공식과 내 몸
그림 3-1 남의 공식과 내 몸 저자 도해

제가 스스로 만든 구멍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여기에 제가 스스로 만든 구멍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수학입니다. 고3을 앞둔 겨울, 저는 유명한 수학 강사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강의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워 보이던 문제가 칠판 위에서 술술 풀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복습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사가 푼 문제는 강사의 것이었지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재미있게 들은 것을 열심히 공부한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두 달을 열심히 들었고, 고3이 되어 만난 문제는 못 풀었습니다. 성적이 더 떨어졌습니다. 1학기 성적을 받고 저는 혼자 수학 포기를 선언해 버렸습니다. 공교롭게도 그해 담임 선생님이 수학 선생님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면담 때마다, 그리고 자율학습 때에도 말했습니다. 왜 수학을 안 하냐고. 저는 그 뒤로 수학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하필 그해는 수학이 쉽게 나왔습니다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입 시험에서 저는 인생 최악의 성적을 받았습니다. 하필 그해는 수학이 쉽게 나왔습니다. 아예 뉴스에도 나오더군요. 역대급으로 쉬웠다고. 그래서 일부 항의가 있었다고요. 수험생 전체 평균 점수는 올라갔고, 수학을 포기했던 제 점수는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평소에 저보다 성적이 낮던 친구들이 저보다 훨씬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원하는 학교와는 아주 동떨어진 학교에 간신히 붙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제가 재수를 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1년을 다시 겪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떠밀리듯 대학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억울했습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이 수준인가. 그 화를 오래 품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긍정의 표정으로 적당히 덮으며 살았습니다. 지금의 제가 그때의 저에게 한마디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그래, 억울했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내가 그 친구들보다 조금 앞섰다고 해서 대단할 것도 없었다. 억울함은 진짜였지만, 억울함이 곧 정의인 것은 아닙니다. 이 구분을 하기까지 30년이 걸렸습니다.

억울함은 진짜였지만

잠과의 악연은 고3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흘러 저는 어학연수비를 벌겠다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야 했습니다. 세상에는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상쾌함을 단 하루도 겪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불쾌했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강도 높은 일을 하러, 북적이는 버스를 타야 했으니까요. (네 시 반 첫차에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것은 처음에 너무 놀라우면서 짜증 나는 광경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새벽 기상에 여러 번 도전했습니다. 결과는 늘 같았습니다. 일어나는 데는 가끔 성공했고, 오전은 언제나 몽롱했습니다. 실패. 잠에 관해서라면 저는 30년 넘게 매번 실패해 온 사람입니다. 이 정도면 꾸준함도 재능입니다.

그런데 이 긴 실패의 목록이 사실은 실패가 아니었다는 것을, 저는 아주 뒤늦게 알았습니다. 저는 의지가 약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8시간을 자야 하는 몸으로, 네 시간 자는 사람의 공식을 30년 동안 빌려 쓴 것뿐이었습니다. 실패한 것은 제가 아니라 저에게 맞지 않는 공식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고3의 선택을 돌아보니 짙은 아쉬움이 남더군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저에게 가장 해로운 방법을 골라서, 가장 성실하게 실행했던 겁니다. 노력이 모자란 적은 없었습니다. 저를 몰랐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맞지 않는 공식은

그때 잠을 지켰다면 점수가 달라졌을까. 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수학을 놓은 것도 컸고, 그해 시험의 난이도도 제 손 밖의 일이었습니다. 원인 하나를 뽑아서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나중에 앉아서 하는 일입니다. 당시의 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저는 제 몸을 모르는 채로 그 1년을 설계했습니다.

그 1년 동안 한 번도 받지 못한 질문

그 1년 동안 제가 한 번도 받지 못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너는 몇 시간을 자야 하는 사람이냐. 어른도, 선생님도, 친구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합니다. 그건 남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문제는 저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 몸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저밖에 없는데, 저는 그 자리를 비워 두고 남의 답을 가져다 채웠습니다. 순서가 틀렸다는 말을 제가 자꾸 하게 되는데, 그 첫 칸이 바로 여기입니다. 나를 아는 일이 먼저고, 방법을 고르는 일이 그다음입니다.

당신은 몇 시간을 자야 사람이 됩니까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몇 시간을 자야 사람이 됩니까. 바로 답이 나오셨다면 다행입니다. 한 번도 진지하게 재어 본 적이 없으시다면, 어쩌면 지금 누군가의 공식을 빌려 살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전자책 『나로부터 시작하는 인문학』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와 도해 34장은 연재 목록에서 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 https://www.peterhan.kr/blog/humanities/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19년째 전문가와 사업가, 임직원의 발표와 소통을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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