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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대체하지 못하는 것 — 자료는 만들어도 책임지는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요약 자료는 누가 만들어도 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AI가 해 주는 일은 자료까지입니다. 자료가 곧 발표는 아닙니다. 경계는 한 줄로 그으면 됩니다. 시간이 드는 일은 맡기고, 판단이 필요한 일은 직접 합니다.

대기전력 분야에서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 한 곳이 미국 조달청에 수주 발표를 하러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나 도저히 영어로는 못 하겠다."

그래서 부사장님이 대신 나서게 됐습니다. 부사장님의 영어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분은 제 코칭을 받는 동안 연신 죄송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발표가 어떻게 됐는지는 글 끝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만 미리 말씀드리면, 그 회사에게는 그 발표가 사업의 규모를 정하는 발표였습니다.

사장님이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자료는 AI가 만들어 줍니다. 초안을 넣으면 슬라이드가 나오고, 표를 넣으면 그래프가 됩니다. 영어 번역도 됩니다. 그러면 발표자가 하는 일은 무엇이 남습니까.

그런데 이 질문에는 착각이 하나 섞여 있습니다. 자료가 곧 발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20년 넘게 프레젠테이션을 코칭했습니다. 고객사는 140여 곳이고 그중 32개사가 포춘 500대 기업입니다. 그러면 AI를 덜 쓰라는 얘기겠구나 싶으실 겁니다. 아닙니다. 쓰셔야 합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두 가지가 손에 남습니다. AI에게 맡길 것과 직접 하실 것의 경계선 하나,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한 문장입니다.

자료는 이제 금방 나옵니다

AI가 해 주는 일은 자료까지입니다. 저는 이 경계를 '자료까지'라고 부릅니다.

발표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내용 이해입니다. 체인을 만들고, 원메시지를 뽑고, 순서를 잡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 이해입니다. 이 둘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AI와 사람이 갈립니다. 내용 이해는 AI가 잘합니다. 구조를 잡고, 요약하고, 순서를 바꾸는 일은 솔직히 저보다 빠른 부분도 있습니다. 사람 이해는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렇습니다.

자료는 누가 만들어도 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AI가 해 주는 일은 자료까지입니다

사람 이해는 그 순간 말을 바꾸는 일입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중에 방 안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앞줄 임원이 미간을 좁히고,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노트북을 덮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이 멈춥니다. 이 신호들은 자료에 안 적혀 있고,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읽고 나면 무언가를 바꿔야 합니다. 뒤에 두려던 비용 이야기를 지금 꺼내거나, 설명하려던 것을 질문으로 던지거나, 기술 이야기를 줄이고 일정 이야기로 옮깁니다. 몇 초 안에 판단하고 바로 실행합니다. 그러려면 자료에서 눈을 떼고 사람을 봐야 합니다. 슬라이드만 보고 있으면 이 신호가 안 들어옵니다.

한 장면으로 보시겠습니다. 발표를 시작한 지 5분쯤 됐고, 준비한 순서대로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왼쪽에 앉은 임원이 페이지를 앞뒤로 넘기고 있습니다. 자료의 뒷부분을 찾는 겁니다. 다른 것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아마 비용이나 일정일 겁니다.

여기서 길이 둘입니다. 준비한 순서를 지키면 그분은 10분 동안 자료만 봅니다. 그 10분 뒤에는 이미 다 읽었습니다. 다른 길은 이겁니다.

"일정 쪽이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그것부터 먼저 말씀드리고 원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한 문장입니다. 이걸 하려면 세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그 신호를 볼 눈, 순서를 바꿔도 무너지지 않는 준비, 그리고 바꿔도 된다고 판단할 권한입니다.

AI가 여기까지 따라오는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걸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와도 남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에토스입니다.

말에는 세 가지 힘이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했습니다.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논리, 듣는 사람의 감정,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신뢰입니다. 2,400년 전 『수사학』 1권 2장에 적혀 있고, 그는 셋 중에서 에토스를 가장 강력한 것으로 봤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이 사람 말이면 믿을 만한가'입니다.

실무에서 에토스는 화려한 말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질문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책임을 질 수 있는가.

회의실에서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자료만 보고 결정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 말을 했는지를 봅니다. 그 사람이 이 일에 붙어 있는 사람인지, 잘못되면 같이 감당할 사람인지를 봅니다.

그리고 이건 자료의 품질과 무관합니다. 완벽한 자료를 들고 온 외부 사람의 말보다, 허술한 자료를 든 담당자의 말이 무겁게 들리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책임은 위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AI는 자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문장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의 결과를 감당하지는 않습니다. 감당하는 것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말하기는 기술이기 이전에 역할입니다.

앞의 부사장님이 그 무대에 선 이유도 이것입니다. 영어를 더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기술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그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책임은 위임되지 않습니다

그럼 AI를 어떻게 씁니까

경계를 이렇게 그으시면 됩니다. 맡겨도 되는 것은 자료의 초안, 표와 그래프, 번역과 표현 다듬기, 예상 질문 뽑기, 긴 문서를 슬라이드로 바꾸기입니다. 직접 하셔야 하는 것은 무엇을 뺄지, 어디서 시작할지, 어느 숫자를 남길지, 그리고 그 방에서 순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앞의 것들은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고, 뒤의 것들은 판단이 필요한 일입니다. 판단은 그 일을 책임지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숫자로 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발표 준비에 쓰는 시간을 100이라고 하면, 보고서를 제대로 쓰는 데 90이 들고 발표 준비에 10이 듭니다. AI가 줄여 주는 것은 그 90 쪽입니다. 10은 줄지 않습니다. 그 10이 당신 몫입니다. AI가 뽑아 준 것은 초안입니다. 초안을 발표로 만드는 것이 당신 일입니다.

한 가지를 더 말씀드려야 합니다. 아는 만큼 전달되지 않으면 저평가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의 손해로 끝난다면 저는 이 책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이 리더가 되고 책임자가 되면 당신의 말하기가 당신 것만이 아니게 됩니다. 겸양해서 잘한 것을 어필하지 못하면, 준비한 것을 다 못 전하면 당신 조직이 잘해 놓고도 저평가받습니다. 인정을 못 받습니다. 수주를 못 합니다.

한 번 못 받은 승인은 그 프로젝트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 해 예산에서 그 팀의 몫이 줄고, 몫이 줄면 좋은 사람을 못 뽑습니다. 한 번의 전달 실패가 몇 년짜리 하강 곡선을 만듭니다. 그런데 그 곡선의 어느 지점에서도 "그때 그 발표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인이 너무 앞에 있어서 안 보입니다.

여기서 리더의 겸양이 가장 위험해집니다. 개인으로서 겸손한 것은 미덕입니다. 조직을 대표해서 말할 때는 아닙니다. 자기 사람들이 한 일을 절반만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료는 누가 만들어도 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20억이라는 문자가 왔습니다

글 머리에서 미뤄 둔 이야기입니다. 사장님이 못 하겠다고 해서 부사장님이 대신 나섰던 그 발표입니다. 그 발표에서 20억 원을 수주했다고 문자를 주셨습니다. 통화도 했는데 많이 흥분하신 상태셨습니다. 저도 같이 흥분했구요.

중소기업에게 20억 원이 어떤 크기인지 아실 겁니다. 그 수주를 못 했다면 그 회사의 사업 규모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채용 계획이 달라지고, 설비 투자가 달라집니다.

기술은 발표 전에도 있었고 발표 후에도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하나였습니다. 그 기술이 미국 조달청 회의실에 제대로 전달됐느냐입니다.

"나 도저히 영어로는 못 하겠다."

이 말이 그 회사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설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어가 유창한 사람이 아니라 그 기술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실무자이신 분. 아직은 당신 한 사람만 평가를 받습니다. 그래도 지금부터 순서를 배워 두십시오. 조직을 대표해서 말해야 하는 날은 예고 없이 옵니다.

팀을 맡고 계신 분. 당신의 말하기는 이미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팀원들이 한 일은 당신 입으로만 밖으로 나갑니다. 겸양은 팀원의 몫을 깎는 일입니다.

조직을 대표해 밖에 서시는 분. 영어로는 못 하겠다는 사장님 대신 미국 조달청에 나섰던 그 부사장님의 역할입니다. 영어가 부족해도, 무대가 낯설어도, 그 무대에 설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질문은 하나입니다. 당신 조직이 잘해 놓고도 알려지지 않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30초 실천

우선은 지난 1년 동안 당신 조직이 잘해 놓고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프로젝트일 수도, 개선한 프로세스일 수도, 막아 낸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떠올리셨으면 한 문장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__을 했고, 그래서 ____이 달라졌습니다."

그 문장을 다음 회의에서 한 번 말하십시오. 그게 전부입니다. 회의가 부담스러우면 팀 메신저에 한 줄로 올리십시오. 말하지 않은 일은 없었던 일이 됩니다.

말하지 않은 일은 없었던 일이 됩니다

마지막 한 문장

글 머리에서 두 가지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경계선은 앞에서 그었습니다. 남은 하나가 이 문장입니다.

알고 있는 만큼, 전문성을 갖춘 만큼, 말하기 능력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말을 잘하자는 이야기도, 말재주를 기르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당신이 10년 넘게 쌓은 것이 회의실 문턱에서 멈추지 않게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건 성격을 바꿔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순서를 바꾸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도구가 바뀌어도 같은 원리가 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책임입니다.

자료는 누가 만들어도 됩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이 글은 전자책 『다 말하지 마세요』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는 스마트스토어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smartstore.naver.com/petercomm/products/13788987324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19년째 전문가와 사업가, 임직원의 발표와 소통을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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