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문장을 적으면 읽게 되고, 키워드를 적으면 말하게 됩니다. 메모를 가져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그 종이에 무엇을 적느냐입니다. 회의 발언에는 명함 크기 포스트잇, 서서 하는 발표에는 A4 절반 큐시트. 보는 때는 세 번입니다.
발표장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발표자가 손에 A4 용지 여러 장을 들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발표 내용이 문장으로 적혀 있습니다. 준비를 많이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발표가 시작되면 그분은 그 종이를 봅니다. 한 문장 읽고 고개 들고, 또 한 문장 읽고 고개 듭니다. 시간이 갈수록 고개를 들고 있는 시간이 짧아집니다. 나중에는 거의 종이만 보고 있습니다. 준비를 많이 했다는 증거가 오히려 준비를 안 한 사람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 종이가 그분에게 무엇을 시키고 있었는지는 글 끝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5분 발표에서 그 종이를 보는 시간이 전부 몇 초인지도 뒤에서 세어 보겠습니다.

앞 편에서 침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침묵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멈춰 있는 동안 불안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불안은 대개 하나입니다. 다음에 할 말을 잊어버릴 것 같다는 것입니다.
발표자 노트에 할 말을 잔뜩 적어 두고, 화면에 안 보이니 종이로 뽑아 가신 적이 있을 겁니다. 반대로 없어 보일까 봐 아무것도 안 가져갔다가 한 번 막힌 적도요.
그런데. 이 불안은 진짜입니다. "그냥 외우세요"라는 말은 도움이 안 됩니다.
저는 20년 넘게 프레젠테이션을 코칭했습니다. 고객사는 140여 곳입니다. 그러면 메모를 놓고 들어가라는 얘기겠구나 싶으실 겁니다. 아닙니다. 가져가셔도 됩니다. 문제는 거기에 무엇을 적느냐입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손에 들 것 두 가지와, 그것을 보아도 되는 때를 알게 됩니다.
키워드만 메모하면 보면서 읽지 않습니다
손에 들 것은 상황에 따라 둘로 나뉩니다. 회의에서 발언할 때는 명함 크기 포스트잇 한 장입니다. 손바닥 안에 들어가고, 책상 위에 놓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서서 하는 프레젠테이션에서는 A4 절반 크기의 큐시트입니다. 방송에서 MC들이 들고 있는 그 종이입니다. 가로로 들고, 글자를 크게 씁니다.
둘의 공통점은 문장이 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포스트잇에는 공간이 없어서, 큐시트에는 글자가 커서 안 들어갑니다. 글자를 작게 써서 문장을 채우면 그건 큐시트가 아니라 대본입니다.
종이에 공간이 남으면 채우게 되고, 채우다 보면 문장이 됩니다. 사람은 눈앞에 문장이 있으면 읽습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반면 키워드는 읽어 봤자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보고 나서 자기 말로 풀게 됩니다.
포스트잇 한 장에 들어갈 것은 이 정도입니다.
[첫 30초] 이탈 8.2 / 15분 / 어디부터 손댈지 원인 — 첫 주 62% 조치 — 초기 설정 단순화 남은 것 — 지표 5개 [닫기] 두 번째 승인
문장이 하나도 없습니다. 숫자와 명사뿐입니다. 그런데 이 한 장에 발표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첫 30초, 키워드 세 개, 마지막의 리캡과 요청까지입니다. 큐시트는 같은 내용을 가로로 펼친 것입니다.
발표 내용을 이 한 장에 적을 수 없다면 아직 정리가 안 된 겁니다. 내용을 한 번 더 봐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포스트잇은 메모지이면서 점검표이기도 합니다.
문장을 적으면 읽게 되고, 키워드를 적으면 말하게 됩니다.

읽지 말고, 세 번만 보십시오
포스트잇을 가져가는 것은 괜찮습니다. 읽는 것이 문제입니다. 읽는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말합니다. 시선은 아래에 머물러 있고 소리만 나옵니다. 참고하는 사람은 잠깐 보고, 고개를 들고, 그다음에 말합니다.
차이는 하나입니다. 보는 동안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 내려다보는 그 2초가 억지로 만들지 않아도 생기는 침묵이 됩니다. 포스트잇을 든다고 없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없어 보이는 것은 보면서 읽을 때뿐입니다.
그러면 언제 보면 될까요. 볼 때를 미리 정해 두십시오. 세 번이면 충분합니다. 첫 번째는 시작하기 직전입니다. 첫 30초와 키워드 세 개를 확인하고, 시작하면 한동안 안 봅니다. 두 번째는 항목이 바뀔 때입니다. "그럼 두 번째입니다"라고 말한 뒤에 내려다보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세 번째는 마무리 직전, 리캡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앞에서 세어 보겠다고 한 숫자가 여기 있습니다. 15분은 900초입니다. 세 번에 2초씩이면 6초입니다. 나머지 894초는 사람을 봅니다. 이 세 번은 전부 말이 잠깐 끊겨도 되는 때입니다. 항목과 항목 사이, 본문과 마무리 사이니까요.
반대로 보지 말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문장 중간입니다. 말하다 말고 내려다보면 막힌 것으로 보입니다. 한 문장을 끝내고 보십시오.
문장을 적으면 읽게 되고, 키워드를 적으면 말하게 됩니다.

흐름을 잃었을 때 돌아오는 법
포스트잇이 가장 쓸모 있는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흐름을 잃었을 때입니다. 질문이 들어와 옆길로 샜고, 답을 하고 나니 어디까지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대본이 있으면 오히려 못 찾습니다. 문장이 빽빽해서 어디가 어딘지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키워드 다섯 개짜리 포스트잇은 한눈에 다 보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두 번째까지 말씀드렸으니 세 번째로 가겠습니다."
이 한마디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듣는 사람도 정리가 됩니다. 길을 잃은 것이 오히려 발표의 구조를 보여 주는 순간이 됩니다.
고개를 들면 그다음이 문제입니다. 사람 눈을 보는 게 부담스럽다는 분이 많습니다. 미간이나 코끝, 인중을 보셔도 됩니다. 조금 멀리서라면 어깨도 충분합니다. 회의실 정도의 거리면 상대에게는 눈을 본 것과 똑같이 느껴집니다. 여러 명 앞이라면 한 문장에 한 사람입니다. 훑으면 아무도 안 본 것이 됩니다.
인상이 크게 갈리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이 막혔을 때 눈동자가 가는 방향입니다. 위로 올리면 당황한 것으로 보이고, 살짝 아래로 내리면 생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침묵인데 정반대로 보입니다. 듣는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막힌 동안 무엇을 하고 있느냐입니다.
문장을 적으면 읽게 되고, 키워드를 적으면 말하게 됩니다.
그래도 통째로 외우는 게 안전하지 않나요
외우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외운 것은 순서가 바뀌면 무너집니다. 질문이 들어오거나 시간이 바뀌면 흔들립니다. 키워드로 말하는 것은 그보다 한 단계 위입니다. 키워드 사이를 그 순간 자기 말로 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서를 바꿔도 되고, 시간이 줄어도 됩니다. 처음에는 키워드가 열 개쯤 필요하실 겁니다. 몇 번 하면 다섯 개가 되고, 나중에는 세 개로 됩니다.
전부 적어 간 사람 이야기도 하겠습니다. 처칠은 연설 원고를 한 글자도 빼지 않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비서들에게 시편을 인쇄한 것처럼 한 행을 짧게 끊어 치게 했습니다. 어디서 숨을 쉬고 어디서 멈출지 한눈에 보이도록 말입니다. 마지막 판은 편지지만 한 작은 종이에 다시 쳤습니다. 그는 문장을 다 적었지만 그 종이는 읽기 위한 종이가 아니었습니다. 보고 고개를 들기 위한 종이였습니다. 종이의 모양이 그 사람에게 시킬 일을 정합니다.
저는 침묵과 포스트잇을 같이 가르칩니다
제가 코칭에서 이 둘을 늘 붙여서 다루는 이유가 있습니다. 침묵을 연습하라고 하면 대부분 어색해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멈추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포스트잇을 쥐어 드리면 멈춤이 저절로 생깁니다. 내려다보는 2초가 그대로 침묵이 되기 때문입니다.
눈을 보라는 말도 저는 하지 않습니다. 고치라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니고, 고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대개 이런 쪽입니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든 것을 바꾸는 쪽입니다. 의지로 안 되는 것을 도구로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당신에게는 포스트잇입니까, 큐시트입니까
회의에서 발언할 일이 많은 분. 명함 크기 포스트잇입니다. 회의 시작 전에 키워드 셋만 적어 노트북 옆에 붙여 두십시오. 발언 차례가 오면 그것만 보고 시작합니다.
서서 하는 프레젠테이션이 많은 분. A4 절반 큐시트입니다. A4 종이를 반으로 접고, 가로로 들고, 글자는 멀리서도 보이게 쓰십시오.
말이 잘 나오는 분. 포스트잇이 없어도 시작은 되실 겁니다. 그래서 더 쓸모가 큽니다. 말하면서 순서를 정하면 두서없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적어 둔 다섯 개가 오늘 말할 것의 전부라고 정해 두고 들어가십시오.
영어로 발표하시는 분은 키워드를 한국어로 적으셔도 됩니다. 영어 문장을 적어 가면 한 단어가 안 떠올라 통째로 막히지만, 키워드는 아는 표현으로 돌려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방향은 같습니다. 종이는 작아지고 글자는 커집니다. 질문은 하나입니다. 다음 발표에서 손에 들 종이는 지금 몇 장입니까.
30초 실천
지금 명함 크기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말해야 할 것을 키워드 다섯 개 이하로 적어 보십시오.
문장은 쓰지 마십시오. 다섯 개가 안 나오면 세 개만 적으십시오. 다 적으셨으면 다른 자료는 덮어 두고, 그 키워드만 보면서 한 번 말해 보십시오.

그 종이는 무엇을 시키고 있었나
글 머리의 A4 뭉치를 든 발표자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분과 포스트잇 한 장을 든 발표자는 준비한 양이 다른 게 아닙니다. 오히려 A4를 든 쪽이 더 많이 준비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손에 든 것이 그 사람에게 시키는 일입니다.
듣는 쪽에서 보면 메모를 읽는 사람은 누군가 써 준 글을 전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그 내용을 아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준비를 많이 한 분이 준비를 안 한 사람처럼 보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분이 준비를 덜 한 게 아니라 종이가 일을 잘못 시킨 겁니다.
종이를 줄이면 사람이 보입니다. 발표자도, 듣는 사람도요.
손에 든 종이의 크기는 성격과 달라서 오늘 바꿀 수 있습니다.
문장을 적으면 읽게 되고, 키워드를 적으면 말하게 됩니다.
이 글은 전자책 『다 말하지 마세요』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는 스마트스토어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smartstore.naver.com/petercomm/products/13788987324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