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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하는 네 번째 부류 — 자료가 사람을 만듭니다

요약 자료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말할 기회는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가지 않습니다. 그 내용을 가장 잘 정리해 둔 사람에게 갑니다. 순환은 정리, 발표, 질문, 답, 다음 기회, 실력의 여섯 칸입니다. 입구는 정리입니다.

2000년이었습니다. LG전자 해외 마케팅 부서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입니다. 어느 날 저는 자리에 앉아서 졸고 있었습니다.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입에게 시킬 일이 없어서 그랬는지, 시킬 만한 사람으로 안 보여서 그랬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낮에 사무실에서 졸다가 혼났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글은 거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발표를 하게 된 계기가 그 자리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몇 달 뒤 저는 선배에게 한마디를 듣습니다.

"야, 니가 좀 해주면 안 되겠냐?"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글 가운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 말 잘한다"고 할 때 떠오르는 얼굴은 크게 셋입니다. 방송 진행자와 예능인, 아나운서, 광고 업계 출신. 셋 다 대단합니다. 오랜 훈련을 거쳐 만들어진 기술이고, 저는 그중 어느 것도 그분들만큼 못 합니다. 문제는 말하기를 배우려고 찾아보면 나오는 사람이 대개 이 세 부류라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회의실에서 기술과 숫자를 설명해야 하는 사람은 배울 곳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 사람이 방송 진행자의 화법을 배우면 남의 지표를 하나 더 얻게 될 뿐입니다.

저는 네 번째 유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 제품을 설명하고, 기술을 알리고, 외국 바이어 앞에서 근거를 대 본 사람의 말하기입니다.

그러면 회의실용 화술을 따로 배우라는 얘기겠구나 싶으실 겁니다. 아닙니다. 제가 가진 것은 화술이 아니었습니다. 파워포인트 25장이었습니다. 그 자료는 나중에 35장이 됐고, 늘어난 10장은 제가 모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 방에서 말할 자격을 어디서 얻었는지는 한 줄로 적어 글 끝에 두겠습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말할 기회가 오는 순서가 보이고, 그 순서에서 당신이 서 있는 자리 하나가 정해집니다.

그 세 얼굴이 서지 않는 자리가 있습니다

네 번째 유형이 서는 자리는 다른 점이 셋입니다. 장소, 청중, 목적입니다. 장소는 무대가 아니라 회의실입니다. 열 명이 앉아 있고 그중 절반은 노트북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청중은 전문가인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의 시청자는 모르는 것을 배우러 오지만, 회의실의 청중은 대부분 그 분야를 압니다. 어설프게 말하면 바로 걸리고, 아는 척하면 더 걸립니다.

목적도 다릅니다. 회의실에서는 감동보다 판단이 목적입니다. 사도 되는지, 승인해도 되는지, 이 방향으로 가도 되는지를 정하려고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한 발표란 듣는 사람이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한 발표입니다.

조건이 이렇게 다르면 필요한 기술도 달라집니다. 톤에 변화를 넣는 것보다 조건을 빠뜨리지 않는 쪽이 앞에 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서게 된 것도 말을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료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졸던 신입은 어쩌다 발표를 맡게 됐을까요

제 담당 제품은 ODD였습니다. 옵티컬 디스크 드라이브, CD와 DVD를 읽고 쓰는 장치입니다. 들어가 보니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품의 기술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입인 저만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선배들도 잘 몰랐습니다. 해외 영업과 마케팅을 하는 부서였고 기술 전문 부서는 평택에 따로 있었습니다. 굳이 알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저는 졸고 있었습니다.

졸던 게 팀장님에게 한번 걸려서 선배에게 혼났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습니다. 그냥 인터넷에 있는 ODD 관련 정보를 전부 모았습니다. 규격, 속도, 경쟁사 제품, 기술 방식, 시장 자료. 사진과 도해가 많아서 문서로는 정리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파워포인트를 열었습니다. 한 장씩 붙이다 보니 25장이 됐습니다. 발표하려고 만든 게 아니고 정리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얼마 뒤 담당 지역이 생겼습니다. 중동과 아프리카였습니다. 어느 날 거래선 바이어가 방문했고,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경쟁 제품보다 기술적으로 뭐가 좋습니까?"

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방에서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저는 마침 그 답이 정리된 파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발표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화면을 넘기면서 아는 것을 말한 게 전부입니다. 끝나고 나서 선배 몇 명이 "이거 괜찮네. 그 파일 좀 줘"라고 했습니다. 저는 파일을 드렸습니다. 이제 선배들이 자기 거래선한테 이 자료로 설명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며칠 뒤 선배 거래선이 왔습니다. 파일은 이미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를 불렀습니다.

"야, 니가 좀 해주면 안 되겠냐?"

그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지금은 압니다. 자료를 가진 것과 그 자료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파일은 옮겨지지만 그 안의 내용은 옮겨지지 않습니다. 슬라이드에는 결론만 적혀 있습니다.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 버린 자료, 확인해 본 반대 사례, 붙였다가 뺀 조건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자료를 만든 사람의 머릿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슬라이드에 적힌 것만 아는 사람은 적힌 것까지만 답합니다. 만든 사람은 슬라이드 밖의 질문에도 답합니다.

"그건 저희도 검토했는데, 이 조건에서 안 맞아서 뺐습니다."

이 한 문장이 나오는 순간 신뢰가 생깁니다. 발표에서 실제로 승부가 나는 지점은 슬라이드가 아니라 질문을 받은 다음입니다. 그 구간에서는 자료를 직접 만든 사람만 답할 수 있습니다. 선배들이 파일을 받아 놓고도 저를 시킨 이유가 그거였습니다. 그날부터 모든 거래선의 기술 설명이 제 몫이 됐습니다.

저는 말을 잘해서 발표를 맡은 게 아닙니다. 발표를 맡게 되면서 말을 하게 됐습니다. 자료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파일은 드렸는데 저를 불렀습니다

늘어난 10장은 전부 물어서 얻었습니다

한 번 맡고 나니 계속 맡게 됐습니다. 그러면 자료를 계속 보강해야 합니다. 일본 히타치에 출장을 가서 기술 연구진과 이야기를 나눴고, 거기서 나온 핵심 문서를 받아 왔습니다. 평택에 있는 품질 담당 기술 전문가들에게는 매뉴얼을 받았습니다. 매뉴얼에서 모르는 부분은 물어보고 이해해 가며 자료에 붙였습니다.

25장에 10장을 더해 35장이 됐습니다. 늘어난 10장은 35장의 3할이 안 됩니다. 그런데 발표에서 실제로 힘을 쓴 쪽은 그 10장이었습니다. 처음 25장은 혼자 모은 것이고, 뒤의 10장은 질문으로 얻은 것입니다.

여기서 순서를 보셔야 합니다. 자료와 자료 숙지가 먼저였고, 발표의 자격은 나중에 따라왔습니다. 우리는 보통 말을 잘하게 되면 발표를 맡을 거라고 보고 말하기부터 배우려고 합니다. 현장은 반대로 돌아갑니다.

정리한다 → 발표한다 → 질문을 받는다 → 답할 수 있다 → 또 기회가 생긴다 → 실력이 는다

그런 기회가 안 온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당연한 반문입니다. 기회는 대개 질문의 모습으로 옵니다. 회의에서 누가 "이거 왜 이렇게 되는 거예요?"라고 물을 때, 그게 기회입니다. 그리고 정리는 아무도 안 시킵니다. 해 두어도 당장은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그런데 질문 하나가 들어오는 날, 그때까지 해 둔 것이 한꺼번에 쓰입니다.

모으는 것과 정리하는 것도 다릅니다. 저도 처음에는 눈에 띄는 자료를 폴더에 넣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폴더에 쌓인 파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정리는 순서를 붙이는 일입니다. 이게 먼저고 저게 나중이라고 정하는 것, 이건 핵심이고 저건 참고라고 나누는 것. 그 판단을 한 번 해 두면 다음에는 그 순서대로 말이 나옵니다.

공자가 『논어』 위정편에서 한 말이 있습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남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모으는 쪽이 배우는 일이고, 순서를 붙이는 쪽이 생각하는 일입니다. 2,500년 전에도 모으기만 하다 끝난 사람이 있었던 셈입니다.

이 순환의 입구는 말하기가 아니라 정리입니다. 자료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늘어난 10장은 물어서 얻었습니다

졸다 혼난 그날이 시작이었습니다

글 머리에서 꺼낸 장면입니다. 저는 그 자리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창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날이 없었으면 자료를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만들지 않았으면 바이어의 질문이 왔을 때 답하지 못했을 것이고, 답하지 못했으면 선배에게 그 한마디도 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면 저는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야, 니가 좀 해주면 안 되겠냐?"

그때는 일을 시키는 말로만 들었습니다. 지금 다시 들으면 다르게 들립니다. 그 방에서 말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려 준 말이었습니다.

정리해 두지 않으면 기회가 와도 못 잡습니다. 그리고 못 잡은 것을 "역시 나는 말을 못 해"로 해석하게 됩니다. 실제 문제는 말할 것을 안 만들어 둔 데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단계에 계십니까

정리 단계에 계신 분. 폴더에 자료는 많은데 순서를 붙여 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파일 하나를 열어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인지만 정해 보십시오. 자료를 새로 만드실 일은 없습니다.

발표 단계에 계신 분. 정리는 해 두셨는데 말할 기회가 안 오는 분입니다. 첫 발표는 거창한 자리가 아니어도 됩니다. 누가 물을 때 그 자리에서 답하는 것이 첫 발표입니다.

질문 단계에 계신 분. 준비한 내용은 말하는데 질문을 받으면 막히는 분입니다. 남이 만든 자료로 발표한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발표에서는 한 장이라도 직접 만들어 보십시오. 그 장에서는 질문이 와도 답할 수 있습니다.

세 단계 모두 말하기 실력과 상관이 없고, 성향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외향형 편) 질문은 하나입니다. 지금 계신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일 하나는 무엇입니까.

30초 실천

우선은 딱 하나만 적어 보십시오. 당신 분야에서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장 자주 묻는 질문 하나입니다. "이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같은 것이면 충분합니다.

적으셨으면 그 질문에 지금 바로 답할 자료가 있는지 보십시오. 없다면 그게 당신이 만들 첫 번째 자료입니다. 부담스러우면 답을 한 줄로만 적으십시오. 그 한 줄이 첫 장입니다. 제 시작도 딱 그 크기였습니다. "경쟁 제품보다 뭐가 좋습니까." 질문 하나였습니다.

질문 하나만 적어 보십시오

자격은 직급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글 앞에서 끝에 두겠다고 한 한 줄입니다. 자격은 직급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정리에서 왔습니다.

저는 말 잘하는 세 부류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방송을 한 적도, 아나운싱을 배운 적도, 광고를 만든 적도 없습니다. 제가 한 것은 제품 하나를 끝까지 정리한 것뿐입니다. 네 번째 유형은 무대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히타치에는 저보다 훨씬 잘 아는 기술자가 있었고, 평택에는 저보다 한참 많이 아는 연구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발표는 제가 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편에 적겠습니다.


당신이 아직 말할 자격을 못 얻은 것은 말솜씨 때문이 아닙니다. 정리해 둔 것이 없었을 뿐입니다.

자료가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이 글은 전자책 『다 말하지 마세요』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는 스마트스토어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smartstore.naver.com/petercomm/products/13788987324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19년째 전문가와 사업가, 임직원의 발표와 소통을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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