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커뮤니케이션 › 프레젠테이션/전문가

기술 전문가를 두고 왜 제가 발표했을까요 — 덜 알아서 잘 전달했습니다

요약 발표의 자격은 청중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 방에서 제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설명하는 자리에는 제가 섰습니다. 덜 아는 사람이 정확도를 지키는 방법은 질문 두 개와, 기다려야 하는 문장 하나입니다.

2박 3일로 이어지는 길고 긴 회의의 마지막 날 아침이었습니다. 미주 지역의 주재원들이 여의도 본사에 모인 PM 회의였습니다. PM은 현지에서 여러 제품을 동시에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지역 대표와 주재원, 우리 쪽 사업부장과 임원과 팀장까지 50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중 제가 맡은 제품은 비중이 가장 작았습니다. 하필 마지막 날 아침 첫 순서였고, 전날 새벽 3시까지 마셨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방 안의 분위기는 이 한마디였습니다.

"빨리 끝내고 사우나나 갑시다."

좌장석에는 사업부장이 앉아 계셨습니다. 기술, 생산, QA까지 이론과 현장을 모두 꿰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분 앞에서, 제품을 가장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는 제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입사한 지 갓 1년, 주어진 시간은 20분이었습니다.

제가 무대에 올라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글 끝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다 틀리면 어떡합니까" 하는 반문도 뒤에서 받겠습니다.

저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타치에는 그 기술을 만든 연구진이 있었고, 저는 출장 가서 설명을 듣는 쪽이었습니다. 평택에는 품질을 책임지는 기술 전문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래선 앞에서 설명하는 자리에는 제가 섰습니다.

이 일은 제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보다 잘 아는 선배가 회의에 앉아 있으면 설명하다가 목소리가 작아집니다. 단순하게 써도 되나 싶어 정확한 쪽을 고르면 발표가 어려워집니다. 둘의 뿌리는 하나입니다. 더 알아야 말할 자격이 생긴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걸 자격의 착각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LG전자에서 ODD 해외 마케팅을 했고, 그 뒤로 20년 넘게 발표를 코칭했습니다. 고객사는 140여 곳, 그중 32개사가 포춘 500대 기업입니다. 만난 분들의 절반은 엔지니어와 전문의였습니다. 더 공부하라는 말이 나오겠구나 싶으실 겁니다. 아닙니다. 알아야 할 양은 오히려 줄어듭니다. 필요한 것은 둘입니다. 전문가에게 던지는 질문 두 개, 그리고 그 답을 밖에서 써도 되는지 판정하는 문장 하나.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그 둘을 손에 들고 나가게 됩니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설명을 맡으면 이렇게 됩니다

깊이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조건이 다 보입니다. "이렇게 됩니다"라고 말하려는 순간 예외가 세 개 떠오릅니다. 정직한 사람일수록 그 예외를 다 붙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이런 방식인데, 다만 온도 조건이 이 범위를 벗어나면 달라지고, 초기 세팅에 따라서도 편차가 있고, 최근 개정된 규격에서는 또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 얻습니다. 전문가는 대개 정확성을 고릅니다. 그게 그 사람의 직업윤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말을 못 하는 분들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도록 훈련된 분들입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 설명하는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필요합니다. 전문가의 말을 고객의 말로 옮기는 자리입니다. 저는 이 자리를 번역자 자리라고 부릅니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오히려 이 자리에 앉기 어렵습니다. 파는 자리에 앉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파는 물건의 언어에 늘상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외향형 편의 기술 영업 전문가도 그랬습니다.

발표의 자격은 청중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전문가는 정확성을 고릅니다

질문 두 개로 번역본을 만듭니다

그러면 덜 아는 사람이 어떻게 정확도를 지킬까요. 질문 두 개를 던지고, 문장 하나를 기다립니다.

첫째, 되물어서 확인합니다. "그러니까 대략 이런 말씀이시죠?" 그리고 제가 이해한 것을 전문 용어 없이 제 말로 다시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대략"입니다. 정확한 답까지 요구하지 않는다는 신호라서 상대가 편해집니다.

둘째, 비유로 바꿔서 확인합니다. "비유하면 이렇다는 말씀인 거죠?" 그리고 제가 만든 비유를 던집니다. 틀려도 됩니다. 고쳐 주는 과정에서 더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전문가 본인은 이미 너무 잘 알아서 비유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이 만든 비유를 고치는 건 잘합니다.

같은 코칭에서 만난 15년 차 선임 프로그래머는 이 지점에서 막혔습니다.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설명을 더 잘게 쪼갰습니다. 못 알아들은 이유는 듣는 사람의 세계에 없는 말로 설명했기 때문인데, 없는 말은 잘게 쪼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전문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대략 그렇게 말해도 결정적인 오류는 없어요."

저는 이 문장을 출고 허가라고 부릅니다. 밖에 내보내도 된다는 승인입니다.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오류는 없다'는 쪽입니다. 이 선을 넘지 않으면 그 설명은 밖에서 써도 됩니다.

최근에 반도체 쪽 분들을 코칭하면서 함께 만든 비유가 둘 있습니다. 첫 주제는 적층 메모리였습니다. 엔지니어의 첫 설명은 "다이를 수직으로 적층하고 TSV로 연결하는 구조"였습니다. 제가 되물었습니다. 옆으로 펼치던 것을 위로 쌓았다는 말씀이시죠. 그래서 한 단계 더 갔습니다.

"비유하면 평면 주차장을 기계식 주차 타워로 바꾼 거네요? 같은 땅에 몇 배를 세우고, 차를 엘리베이터로 옮기니까 차에서 차까지 걸어가는 거리도 짧아지고요."

그분이 한 군데를 고쳤습니다. "땅을 아끼는 것보다 거리가 짧아지는 게 더 중요해요. 엘리베이터가 TSV고요." 그리고 그 말이 나왔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결정적인 오류는 없다고요.

두 번째 주제는 고대역폭 메모리였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던졌습니다. 공장 바로 옆에 창고를 붙이고 문을 1,024개 뚫은 것이라고요. 그분이 웃으면서 덧붙였습니다. "문 개수가 대역폭이에요." 두 비유 다 제가 던지고 그분이 고쳐서 나왔습니다. 번역자 자리는 전문가 옆에 앉는 자리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오류는 없어요

결정을 바꾸는 디테일만 남깁니다

그 분야의 담당 전문가가 아니라면 큰 그림의 메커니즘과 흐름만 알면 됩니다. 정말 강조해야 하는 일부만 제대로 알면 충분합니다.

문제는 어디까지가 '일부'인지 판단하는 일입니다. 기준은 하나입니다. 듣는 사람의 결정을 바꾸는 디테일만 남깁니다. 숫자 하나가 승인 여부를 가른다면 남기고, 알아도 결정이 안 바뀌면 뺍니다. 그 판단이 발표 준비의 절반입니다.

덜어 내는 것이 솜씨라는 이야기는 오래됐습니다. 『장자』 양생주 편에 포정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소를 잡는 사람인데, 지금으로 치면 궁중 주방의 장인입니다. 그의 칼은 19년 동안 수천 마리를 다루고도 방금 간 것 같았습니다. 뼈를 힘으로 자르지 않고 관절 사이의 틈으로만 칼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솜씨는 덜 베는 데서 왔습니다. 설명도 그렇습니다.

그러다 틀리면 어떡하느냐는 반문이 남았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다만 "모르겠습니다"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단정해서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확인해서 오늘 중으로 드리겠습니다. 다만 지금 판단하시는 데 필요한 건 이 조건인데, 그건 이렇습니다."

세 부분입니다. 모른다는 인정, 언제 준다는 약속, 지금 판단에 필요한 것은 드린다는 것. 이렇게 하면 모른다고 말한 것이 오히려 신뢰가 됩니다. 조건을 붙이는 사람은 말을 바꾸지 않을 사람으로 읽힙니다.

발표의 자격은 청중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무대에서 가장 먼저 한 일

여의도의 그 아침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앉아 있는 분들의 얼굴과 몸짓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 피곤해, 빨리 끝내.

저는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스트레칭을 시켰습니다. 인사도 자기소개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 같이 일어나서 몸을 풀자고 했고, 3분 정도 했습니다.

계산해 보면 이렇습니다. 50명이 20분이면 1,000분입니다. 회사 시간으로 16시간이 넘습니다. 그중 3분을 썼으니 150분을 버린 셈입니다. 그런데 그 150분이 나머지 850분을 살렸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 알았습니다. 앞에 선 사람이 자신 있게 말하면 사람들은 따라 줍니다. 막내가 시켰는데도 다들 따라해 주셨습니다. 제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제품을 가장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는 제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제가 그 방에서 제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면 스트레칭을 시킬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잘 아는 사람은 내용을 어떻게 다 전달할지를 걱정합니다. 저는 전달할 내용이 적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상태를 볼 여유가 있었습니다. 덜 아는 것이 약점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설명이 오가는 방에는 자리가 셋 있습니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의 자리. 이 글이 조금 불편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의 정확성은 결함이 아닙니다. 그것을 밖으로 내보낼 번역자가 옆에 있는지 보십시오. 없으면 잠깐 그 자리로 건너가셔야 합니다.

번역자 자리. "내가 이걸 말해도 되나"를 오래 고민하셨을 겁니다. 됩니다. "결정적인 오류는 없어요" 한 문장만 받으시면 됩니다. (말 잘하는 네 번째 부류)

듣는 자리. 설명이 길어지면 물어보십시오. "대략 어떤 말씀이시죠?" 그 한마디가 상대를 번역자 자리로 옮겨 줍니다.

질문은 하나입니다. 지난주에 한 설명 가운데, 상대가 "대략 이런 말이군요" 하고 되받아 준 것이 하나라도 있었습니까.

30초 실천

우선은 가장 자주 설명해야 하는 개념 하나를 이 형식에 맞춰 한 문장으로 만들어 보십시오.

"쉽게 말하면, ______ 같은 겁니다."

쉽게 말하면 ○○ 같은 겁니다

빈칸에 들어갈 것은 그 분야 바깥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같은 분야 용어로 채우면 번역이 되지 않습니다. 안 채워지면 집 안에 있는 물건에서 고르십시오. 주차장, 창고, 냉장고, 택배 상자. 만드셨으면 전문가에게 보여 주고 이 말이 나오는지 보십시오. "그렇게 말해도 되겠네요."

그 아침으로 다시

그 방에는 저보다 그 제품을 잘 아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저였습니다. 지식의 양으로 줄을 세운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끝나고 쉬는 시간에 목소리가 걸걸한 미국 담당 부장님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이런 친구들 출장 좀 보내줘요. 거래선 교육 좀 시키게."


더 알아야 말할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 두 개와 문장 하나는 이번 주에 써 볼 수 있습니다.

발표의 자격은 청중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전자책 『다 말하지 마세요』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는 스마트스토어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smartstore.naver.com/petercomm/products/13788987324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19년째 전문가와 사업가, 임직원의 발표와 소통을 돕고 있습니다.
고객사 140+, Fortune500기업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