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전문가의 말하기는 화술에 앞서 준비입니다. 3주를 준비한 보고가 미뤄지는 것은 자료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순서가 없어서입니다. 같은 15분 보고에서 달라진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 30초, 순서를 잠깐 바꾼 한 번, 질문 재확인 한 번.
회의가 끝났습니다. 3주를 준비했습니다. 숫자는 세 번 확인했고 예외 조건도 다 넣었습니다. 그 방에서 그 내용을 발표자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진척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잘 들었습니다. 검토해보죠."라고 했고, 회의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습니다. 2주 뒤에 다른 부서가 비슷한 안을 들고 왔습니다. 그건 그 자리에서 바로 통과됐습니다.
퇴근하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이 회의실로 글 끝에 다시 오겠습니다. 같은 보고가 잘 풀린 15분 장면도 있습니다. 두 회의실에서 달라진 것은 세 가지뿐인데, 그 셋은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분들은 원인을 성격에 둡니다. 조용한 분은 "저는 내향형이라서요"라고 합니다. 말이 잘 나오는 분은 반대쪽입니다. "말이 빨라져서요", "장황하다고들 합니다". 방향은 반대인데 결론은 같습니다. 표현력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민이 양쪽에 다 있으면 어느 한쪽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20년 넘게 프레젠테이션을 코칭했습니다. 고객사는 140여 곳이고 그중 32개사가 포춘 500대 기업입니다. 만난 분들은 대략 반반이었습니다. 절반은 영업 직군, 절반은 개발자와 엔지니어와 전문의입니다. 양쪽 다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였고, 양쪽 다 발표에서는 자기 값을 못 받았습니다.
말하기 글이니 발성 이야기가 나오겠구나 싶으실 겁니다. 아닙니다. 목소리는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다음 발표에서 먼저 손댈 자리 하나가 정해집니다.
자료가 부족했던 게 아니라 순서가 없었습니다
그 방의 사람들은 자료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반대였습니다. 자료가 워낙 촘촘해서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가 안 보였습니다.
발표자는 아는 것을 다 담았습니다. 그건 성실함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에게 스무 개를 주면 스무 개가 저장되지 않습니다. 정보들이 서로를 밀어냅니다.
그 자리에 필요했던 것은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이해였습니다. 한 장에 메시지 하나, 사이에 연결어 하나, 시작에 키워드 세 개, 오늘 무엇을 정해 달라는 요청 하나. 그날 할 일은 덜어 내기였습니다.
전문가의 말하기는 화술에 앞서 준비입니다.
같은 15분인데 이 보고는 왜 통과됐을까요
15분짜리 보고를 시작합니다. 첫 30초에 세 가지를 말합니다. 오늘 무엇을 말할지, 몇 분 걸릴지, 듣고 무엇을 얻는지. 그리고 준비된 순서대로 갑니다. 5분쯤 지났을 때 앞에 앉은 임원이 자료를 넘기다가 툭 던집니다.
"근데 일정은 가능한 거예요?"
여기서 순서를 잠깐 바꿉니다.
"네, 일정은 이미 확인했습니다. 두 가지 변수가 있지만 가능합니다. 자세한 것은 마무리에 함께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원래 순서로 돌아와 발표를 마칩니다. 질문이 들어오면 한 번 확인하고, 답하고, 답이 됐는지 다시 확인합니다. 회의가 끝날 때 이 말이 나옵니다.
"오케이, 그렇게 갑시다."
그날 목소리는 그대로였습니다. 속도도 억양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바뀐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 30초, 순서를 잠깐 바꾼 한 번, 질문 재확인 한 번.
숫자로 보면 더 작습니다. 15분은 900초입니다. 그중 미리 외워 둔 구간은 앞의 30초뿐입니다. 900초의 30분의 1입니다. 나머지 870초는 원래 알던 내용을 원래 순서로 말한 것입니다.

목소리가 늘 뒷순위인 진짜 이유
전문가의 말하기는 세 층입니다. 맨 아래 기반이 내용 숙지, 그 위가 말하는 순서, 맨 위의 표면이 화술입니다. 많은 분이 맨 위층부터 손을 댑니다. 눈에 가장 잘 보이고, 남이 지적하는 것도 거기니까요. 그런데 아래 두 층이 비어 있으면 화술은 얹힐 자리가 없습니다.
이 순서를 2,400년 전에 적어 둔 사람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 1권 2장에서 설득의 수단을 셋으로 꼽았습니다.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 말의 논리, 듣는 사람의 상태, 말하는 사람의 신뢰입니다. 세 가지 안에 목소리는 없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발표 평가표의 항목이 저 셋뿐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만난 정말 잘하는 전문가들은 말을 재미있게 하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속으로 "그러면 이건 어떻게 됐지?" 하고 물으려는 순간에 그 답이 나옵니다. 자기가 아는 순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궁금해하는 순서로 말한 것입니다.

저도 같은 진단을 들고 다녔습니다
저는 원래 내향형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무대 울렁증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락반장으로 60명 앞에 한 번 섰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LG전자에서 해외 마케팅을 했습니다. 담당은 ODD, CD와 DVD를 읽고 쓰는 PC용 기기였습니다. 신입 때는 일이 없어서 졸다가 혼났습니다. 그 뒤로 제품 자료를 혼자 정리하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 자료로 발표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넘게 발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저도 그 질문을 오래 들고 다녔습니다. 그때 제가 적어 둔 답은 성격이었습니다. 성격은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답은 저를 그 자리에 묶어 두기만 했습니다.
저평가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도 않습니다. 사장님이 영어로는 못 하겠다고 해서 부사장님이 대신 미국 조달청 발표에 나간 중소기업이 있습니다. 기술은 이미 검증되어 있었고, 남은 문제는 그것이 상대에게 전달되느냐였습니다. 그 자리에 걸린 금액이 20억 원이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자리에 서 있습니까
조용한 분. 말수가 적은 것은 약점이 아닙니다. 진중함에 전문가의 권위가 더해지는 쪽입니다. 손댈 곳은 성향이 아니라 순서입니다. (내향형 편)
말이 잘 나오는 분. 표현력은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속도와 눈높이 두 가지만 잡으면 효과가 훨씬 커집니다.
둘 다 아닌데 성과가 안 나는 분. 열심히 준비했는데 결정이 안 나는 경우입니다. 준비가 부족한 게 아니라 덜어 내기를 안 한 겁니다.
질문은 하나입니다. 지난 발표에서 청중이 가져간 메시지를 하나만 말해 보라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30초 실천
우선은 다음 발표에서 들어야 할 말 하나만 적어 보십시오. 대본이 아닙니다. "오늘 결정해 주실 것 하나"를 종이에 한 줄로 적는 겁니다.

한 줄이 바로 안 나오면 그게 지금의 답입니다. 발표자가 못 적는 것을 청중이 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적으셨으면 그 한 줄을 첫 30초에 넣으십시오.
그 회의실로 다시
글 머리에서 약속한 자리입니다. 자료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발표자는 그 방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빠진 것은 순서였습니다.
두 회의실에서 달라진 셋은 이것입니다. 첫 30초 오프닝, 일시적으로 순서 바꾸기 한 번, 질문 재확인 한 번. 순서는 성격과 달라서 이번 주에 손댈 수 있습니다.
당신은 원래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적절하게 말하는 순서를 안 배웠을 뿐입니다.
전문가의 말하기는 화술에 앞서 준비입니다.
이 글은 전자책 『다 말하지 마세요』의 연재입니다. 전체 원고는 스마트스토어에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smartstore.naver.com/petercomm/products/13788987324
한창훈 · 피터의 커뮤니케이션